성경연구/성경강해에 해당하는 글 8

앞서 가시는 하나님

성경연구/성경강해|2023. 11. 1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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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가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앞서 가십니다. 앞서 가신다는 말은 '인도하신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앞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목자로서의 앞서 가시며, 용사로서 앞서 가십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 속에 앞서 가시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 소개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앞서 가시는 하나님

출애굽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

  • 출애굽기 23: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 출애굽기 23:23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 출애굽기 23:27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물리치고 네 모든 원수들이 네게 등을 돌려 도망하게 할 것이며
  • 출애굽기 23: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앞서 가신다는 표현이 나온다. 사자는 천사를 뜻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앞서 가신다는 말이다.

신명기 1:30-33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목자로서 앞서 가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는 것은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목자는 양을 인도합니다. 양은 주인이 가는 그 길을 따라갑니다. 시편 23편에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다윗의 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시편 23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앞서 가시고, 앞서 보이시고, 모든 것을 먼저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이 되셨습니다. 먼저 고난을 당하시고 자기부정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본이 되는 삶은 앞서 가는 삶입니다.

 

세속식
예수님은 목요일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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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묵상

성경연구/성경강해|2023. 11. 1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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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창세기 3장은 인류의 타락이 담겨 있습니다. 풍요로운 에덴동산에 살면서 어떻게 타락하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타락의 의미를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1. 1-7 뱀의 유혹과 타락


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의 가장 지혜로운 존재였습니다. 그런 안타깝게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고 말았습니다. '간교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나쁜 의도를 가진 단어가 아닌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뱀이 요한계시록에서 ‘붉은 용’으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뱀은 어떻게 사람을 유혹해 타락하게 만들었을까요?


뱀은 여자에게 접근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도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뱀의 질문에는 독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하와는 독이든 사과를 덥석 물어 버립니다. 하와가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그런데 하와의 대답이 약간 이상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 하셨지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반드시 죽으리라’가 ‘죽을까 하노라’로 바뀌어 있습니다. 2:17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었던 걸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2장의 순서를 봅시다. 1-3절은 안식하신 이야기를 합니다. 4-17절은 남자의 창조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며 계명을 줍니다. 그다음 18-25절에서 여자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여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직접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계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하와에게 전달해 주었을 것입니다.


다시 3장으로 돌아가 뱀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뱀은 여자의 말을 듣고 곧바로 응수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그곳에 그 이유를 밝힙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을 듣고 하와는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전에는 몰랐는데 뱀의 말을 듣고 그 나무를 보니 달라 보였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6절)였습니다. 자 보십시오. 지금 여기서 기술된 하와의 마음은 하와 자신의 마음이 아닙니다. 뱀이 심어 놓은 독에 중독된 관점입니다.


뱀의 독을 마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의존 신앙을 버리고 스스로 신이 되었습니다. 모든 선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2. 8-21 하나님의 심문

 

죄는 지은 이후 인간들이 어떻게 바뀌는가를 주목해 봅시다.

 

먼저, 영적 관계의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8절) '하나님의 낯' 즉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말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둘째, 대인 관계의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죄의 원인을 상대에게 돌렸습니다. 이제는 한 몸이 아니라 타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샤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타락은 자신을 스스로 신으로 만들면서 철저히 타인을 수단화시켰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숭배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애굽의 모습입니다.


셋째, 희망의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저주했고, 삶이 지옥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죄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지옥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거두심으로 죄의 삶을 연속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이제는 부활을 기다리며 영원한 생명을 꿈꾸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희망을 남겨 주었습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하여금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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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묵상

성경연구/성경강해|2023. 11. 1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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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1-3절 안식일을 복주심

 

창조가 끝이 났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마치시고 그치셨다. 안식은 쉼을 말한다. 마지막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하셨다. 히브리어 ‘샤바트’는 ‘일을 중지하다’ ‘행동을 멈추다’의 뜻이다.(천사무엘 창세기) 거룩하다는 ‘구분해 따로 놓다’의 의미로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모든 날을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마지막 일곱째 날만 그렇게 하셨다.

 

4-25절 에덴 동산과 계명

 

4-6절 인간의 창조의 필요성

 

‘내력’(4절)은 최초로 등장하는 톨레돗으로 ‘족보’ ‘역사’ 를 뜻한다. 톨레돗이 왜 이곳에 등장하는 지 모호하다. 하지만 인간의 창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내력’ 즉 역사는 적절해 보인다. ‘땅과 하늘’(4절)은 1장의 ‘하늘과 땅’(1:1)과 역치되어 있다. 이제 땅이 화제의 중심에 선 것이다. 앞으로 땅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땅(에레츠)은 비가 내리지 않았고, 갈(경작 에베드)할 사람도 없다. 초목과 채소가 경작할 사람과 연결시키고 있다. 땅과 사람은 창조 때부터 서로 연관을 지어왔고, 땅을 사람의 섬김(에베드)를 받아야 함을 나타낸다.

 

7-9절 사람의 창조와 에덴동산

 

7-9절까지는 사람과 에덴동산의 두 나무를 소개한다. 모든 악의 근원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연관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땅의 흙으로 만드셨다. 7절의 흙은 토양이 아닌 ‘먼지(샤파르)’이다. 땅은 에레츠가 아닌 아담의 기원이 되는 ‘아마드’이다. 아마드의 샤파르(먼지)로 인간을 만든 것이다. 그 인간에게 하나님은 생기를 불어 넣으신다. 생기는 ‘네샤마’로 코로 호흡할 때 그 바람이다. 노아의 홍수 때 코로 숨쉬는 모든 생물은 죽었는데 이 때 사용된 ‘숨쉬다’는 동일한 네샤마이다. 숨을 끊어버림으로 생명을 앗아 간다. 코를 통해 바람이 들락거리는 것이 곧 생명이다.

 

‘동방’에 에덴 동산을 창설하셨다. 성경에서 동쪽은 굉장히 경계해야할 방향이다. 동방사람, 동쪽으로 이동 등의 포괄적인 의미 속에서 동쪽은 이방인, 저주 받은 곳, 타락한 죄인들이 사는 곳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방을 해가 떠오르는 곳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성막과 성전이 동쪽을 향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 사람으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셨다. 동산에 많은 먹을 거리를 주셨고,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두셨다.

 

10-14절 에덴에서 흘러 나오는 네 강

 

에덴 동산에서 강이 시작된다. 강은 생명의 근원이다. 에스겔의 성전과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의 보좌에서 강이 흘러나오는 것은 에덴 동산을 모형으로 한다. 에덴은 하나님의 보좌였던 것이다. 네 강의 이름은 비손, 기혼, 헷데겔과 유브라데이다. 성경에서 4는 완전함을 의미하며, 네 방향은 온 세상을 뜻한다. 비손 강이 흐르는 하윌라의 금은 순금이다. 더렵혀지지 않는 완전하고 흠 없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설명이다. 네 강과 관련된 상징들은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등장하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동산을 의미한다.

 

15-25절 아담의 사역과 계명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 동산으로 이근다. 경작하다는 히브리아 아바드는 섬기다는 뜻으로 영어의 서비스의 기원이 되는 단어다. 서비스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다'로 사용된다. 결국 아담의 이 땅을 섬기는 자로 존재하는 것은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면 안된다. 중립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만, 다른 의미로 아담의 운명이 숨겨져 있다.

 

2장의 핵심은 여자를 창조하는 것이다. 1장에서 '사람' 안에 남자와 여자지만, 2장에서는 남자 안에서 여자가 나온다. 이것은 여자의 기원이 남자인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이다. 성경은 종속이 억압이 아니라 '한 몸'으로 표현한다. 독립적이면서 독립적이지 않는 것이 부부다. 부부는 같은 운명 공동체이며, 한 곳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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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묵상

성경연구/성경강해|2023. 11. 1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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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창세기 1장은 모든 성경의 시작이요 존재의 의미를 밝혀주는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중에 하나이다.천지창조의 구분

 

창조 개요

창세기 1장은 모든 시작을 알린다.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첫째날, 빛과 어둠을 나눔

둘째날, 물을 나눔 - 공간, 궁창이라고 부름

셋째날, 물과 땅을 나눔 - 뭍을 물 속에서 불러냄, 땅에 열매 맺는 나무를 자라게 하심

넷째날, 날짜와 연한을 만들고 빛으로 비추게 함, 빛으로 채움,

다섯째날, 물을 물고기로 채움, 궁창을 새로 채움

여섯째날, 뭍에 동물과 사람을 지음, 채움

일곱째날, 안식하심

첫째날은 넷째날에 대응한다. 첫째날 빛을 만듬으로 넷째날 빛이 주관하도록함
둘째날은 다섯째날과 대응한다. 둘째날 물을 나눔으로 공간을 확보하여 다섯째날 물에는 어류로 채우고, 공간은 새로 채운다.
셋째날은 여섯째날과 대응한다. 섯째날 뭍을(마른땅)을 불러내고, 여섯째날 뭍을 동물과 사람으로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 칠일째 되는 날은 모든 날에 대응하여 안식하신다.
창조의 마지막은 사람의 창조이며, 창조의 마지막 목적은 안식이다.
무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의 채워짐으로 끝을 낸다.
모든 만물의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과 말씀으로 존재하게 된다.

육일동안 창조사역은 후일에 일어나 구속사적 의미와 완벽하게 부합한다.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아무 것도 없는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을 주시고(약속) 말씀대로 생명을 태어나게 하신다. 즉 말씀이 생명이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무다. 그러나 모세를 통하여 말씀을 주시고 홍해를 가르고 가나안을 허락하신다. 이것은 첫째날의 무에서 빛을 주시고, 홍해를 가름으로 물 속에 감추어진 마른땅을 불러내신다. 이것은 셋째날의 사역이다. 광야의 삶을 통해서 말씀이 전부임을 드러내신다. 가나안은 에덴동산을 상징하며 마지막 종착지이다. 가나안은 은혜로 주어진다. 이스엘의 삶은 오직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사역은 영적이며, 구속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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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편 묵상

성경연구/성경강해|2023. 11. 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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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편

시편 2편은 하나님께서 시온(예루살렘)에 왕을 세우시고 열방을 통치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열방의 왕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시온의 왕을 통해 모든 나라와 열방들이 무릎꿇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통치 도구는 십자가이다.

 

본문 읽기

 

2: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2: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2: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2: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2: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2: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2: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편 묵상

 

시편 2편은 여호와께서 시온산에 아들을 왕으로 세우시고 통치하겠다는 선언으로 메시야 시편에 속합니다. 저는 시편2편 구조를 아래와 같이 구분했습니다.

 

  • 1-3절 열왕들의 모반
  • 4-6절 하나님의 조소(嘲笑)와 선언(宣言)
  • 7-9절 아들을 왕으로 세우심
  • 10-12 아들과 화해하라

 

1. 1-3절 열왕들의 모반

 

시편 2편은 하나님의 놀람으로 시작한다. ‘어찌하여’는 이해할 수 없는 이방 나라와 열왕들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서 놀라신다는 문학적 표현이다. ‘이방 나라’ ‘민족들’ ‘세상의 군왕들’ ‘관원들’은 모두 ‘헛된 일’을 꾸미는 자들이다. 이들은 ‘서로 꾀하’고, ‘우리’라고 부른다. 한 통속이 되어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2절)를 대적한다. 하나님은 이들의 반항에 어이없어하시고, 황당해하신다. 그들은 대적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으며, 그들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어리석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맨 것’과 ‘그의 결박’은 하나님의 통치, 또는 계명을 말한다. 1부는 땅의 일이다. 이제 시인의 눈은 하늘로 옮겨간다.

 

2. 4-6절 하나님의 조소(嘲笑)와 선언(宣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그들은’ 땅에 있다. 그들이 분을 발했지만(1절),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분노하신다.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신다. ‘내가’가 강조된다. 그들은 반역하고 거역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2절)가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시온의 ‘왕’(6절)이다. ‘그들은’ 무력하고 헛된 일을 꾸몄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2부는 천상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선언이다.

 

3. 7-9절 아들을 왕으로 세우심

 

‘내가’(7절)는 시온의 왕이다. 그가 여호와께 받은 것을 선포한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선언한다. 고대 왕들은 신들의 아들이다. 항상 자신을 ‘~의 신의 아들’(Divi filius)로 자신을 소개했다. 땅의 왕은 하늘의 하나님을 대리한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통치한다.

 

‘이방 나라’(8절)는 그의 유업이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이방 나라’(1절)은 분노했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통치를 거절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시온의 왕은 그 소유가 ‘땅 끝가지’(8절) 이르기 때문이다. 즉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방언, 모든 민족들에게 통치권이 행사된다. 시편 19편은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 시편 19:1-6
  •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시온 왕의 통치는 곧 말씀의 통치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온 우주를 통치하듯 시온의 왕의 통치 영역도 무한하다. 철장과 질그릇은 시온의 왕이 능력을 드러낸다. 요한은 이 구절을 두아디라교회에 적용시킨다.

 

  • [요한계시록 2:26-27]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말씀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그것이 시온 왕의 통치 방법이다. 이제 4부로 넘어가 반항자들이 어떻게 해야 지혜로워지는가를 알려 준다.

 

4. 10-12 아들과 화해하라

 

‘그런즉’(10절)은 명백한 사실과 결론이다. 이미 답은 내려졌고, 승패는 끝이 났다. 시인의 권면이 이어진다. ‘군왕들아!’는 다정하게 또는 엄위하게 경고 또는 권면일 수 있다. 지혜를 얻어야 한다. 무엇이 진정 자신을 위한 일인지를. 결국 ‘여호와를 경외함’(11절)이 지혜이다. ‘그의 아들’(12절) 여호와가 기름 부은 자이며, ‘시온의 왕’이다. 진정한 복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12절)다. ‘다’는 예외 없음으로 여호와는 비록 반항하고 거역한 자라도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을 용서하시고 받아 주심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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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편 묵상

성경연구/성경강해|2023. 11. 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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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편

시편 1편은 시편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편입니다.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여 그들의 종말을 보여줌으로 궁극적으로 의인이 하나님 앞에서 형통할 것을 소개합니다. 지금 현재에 종속되어 삶을 해석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미래의 관점에서 해석하도록 유도합니다. 믿음은 현실 너머 보이지 않는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본문 읽기

 

개정개정 시편 1편

  •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70 인경(LXX)

  • 1 μακάριος ἀνήρ ὃς οὐκ ἐπορεύθη ἐν βουλῇ ἀσεβῶν καὶ ἐν ὁδῷ ἁμαρτωλῶν οὐκ ἔστη καὶ ἐπὶ καθέδραν λοιμῶν οὐκ ἐκάθισεν
  • 2 ἀλλ' ἢ ἐν τῷ νόμῳ κυρίου τὸ θέλημα αὐτοῦ καὶ ἐν τῷ νόμῳ αὐτοῦ μελετήσει ἡμέρας καὶ νυκτός
  • 3 καὶ ἔσται ὡς τὸ ξύλον τὸ πεφυτευμένον παρὰ τὰς διεξόδους τῶν ὑδάτων ὃ τὸν καρπὸν αὐτοῦ δώσει ἐν καιρῷ αὐτοῦ καὶ τὸ φύλλον αὐτοῦ οὐκ ἀπορρυήσεται καὶ πάντα ὅσα ἂν ποιῇ κατευοδωθήσεται
  • 4 οὐχ οὕτως οἱ ἀσεβεῖς οὐχ οὕτως ἀλλ' ἢ ὡς ὁ χνοῦς ὃν ἐκριπτεῖ ὁ ἄνεμος ἀπὸ προσώπου τῆς γῆς
  • 5 διὰ τοῦτο οὐκ ἀναστήσονται ἀσεβεῖς ἐν κρίσει οὐδὲ ἁμαρτωλοὶ ἐν βουλῇ δικαίων
  • 6 ὅτι γινώσκει κύριος ὁδὸν δικαίων καὶ ὁδὸς ἀσεβῶν ἀπολεῖται

 

Psalm 1 Aleppo Codex

 

시편 1편 히브리어

 

[시편 주해]

 

시편 1편은 시편을 여는 문의 역할을 한다. 6절이란 짧은 단어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며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시다. 1편은 놀랍게도 히브리어 첫 자인 알렙으로 시작하며 마지막 절은 히브리어 끝 자인 타우로 마친다. 인생의 시작과 끝은 알파벳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내와 나무, 열매와 쭉정이 등의 비유는 율법을 따라 사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잘 드러내주는 문학 장치이다. 1편은 지혜시에 속하면 인생의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알려 준다. 지혜는 율법(토라)을 묵상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과 삶의 열매를 맺게 하며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토라송에 속한다. 15편 19편 119편은 '토라시편'에 속한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 하지 않는다.

  •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절은 감탄사로 시작한다. 한글번역을 충분히 감탄사를 표현하지 못한다. ‘오! 복 있는 자여’로 번역하면 더 좋지 않을까. 70인역은 μακάριος로 번역하는데 이 표현은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마태복음은 시편 1편의 ‘복’을 70인역에서 그대로 차용함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수 있다. 김정우는 '복이 있다'를 '어떤 사람이 이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선포하거나 서술하는 형식'이라고 말한다. 즉 감탄사로는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행복하다'로 번역하고 싶어 한다. 즉 지금 행복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설명하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시편의 시작은 서술이기보다 확고한 선언 또는 감동적인 고백이라고 본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 세 단어는 복수형태이지만 단수로 번역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악인의 복수형은 '모든 악인' 또는 그들이 저지르는 모든 죄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세 용어와 세 단어는 반복인 동시에 점진적 상태에 대한 반복이다. 꾀(아짜트)는 모략이나 모임의 뜻이다. 여러 사람들의 말들인 것을 감안하여 임승필은 '결의'라고 했으며, 다후드는 '회집'으로 본다. 쿰란 문서에 이 단어가 '(악인과의) 교제'인 것을 감안하면 한 사람이 악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마음에 둔 상태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악한 말들, 또는 악한 사람들의 말들을 귀로 듣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둔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하여 듣고 마음에 담아 두는 행위는 다른 말들에 비해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을 의미하며, 그대로 따라 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죄인의 길에 선다.는 표현은 습관을 말한다. 악인은 벌써 그 행위를 여러 번 반복했고, 이제 습관이 되었다는 뜻이다. ‘선다’는 표현은 ‘멈춘다’의 뜻이 아니라 ‘계속 동일한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 두 번째는 특징은 악한 자들의 행위를 마음에 두고 그것을 직접 실천해 보는 것이다. 그의 모범은 악이고, 나쁜 짓들이다. 그것들이 몸에 배어 고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악을 흉내 내는 것은 악이다. 악인의 편을 드는 것도 악이다. 악에 중독된 사람들, 악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악을 좋아하고, 그것에 자신을 내 던진 사람들이다.

 

오만하다는 표현은 조롱하다는 뜻이다. 자리에 앉다는 말은 통치하다는 뜻이다. 루터는 자리를 ‘공적인 관직’으로 이해했다. 김정우는 ‘완성’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결국 자리에 앉다는 표현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을 뜻한다. 자신이 신이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조롱한다. 즉 판단하고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귀를 사용하여 듣는다. 두 번째는 발을 사용하여 걷는다. 세 번째는 몸 전체를 사용하여 앉는다. 크레이키는 '인간의 성품과 행위가 타락해 가는 세 가지 단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복있는 자는 이러한 악인이 가는 길을 걷지 않는다. 그는 귀를 더러운 꾀를 들려주는 조언에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발을 악인들의 길에 걷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몸을 타인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 세 가지 종류의 명칭과 동사는 점진적이며, 체화되는 과정이다. 의인은 이러한 세 동사에 대해 부정한다. 그것들은 아니다. 진심으로..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2절에서 그것을 밝힌다.

 

2절 복있는 사람은 - 한다.

  •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2절은 1절의 역전이며, 역치(易置)이다. ‘오직’은 영어의 ‘but’의 개념보다는 ‘오로지’라는 뜻이 더 어울린다.(김정우) 그는 오로지 여호와의 율법(토라)에 즐거워한다. 1절에도 분명 악인은 꾀를 듣고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즐겁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2절에서 여호와의 토라를 즐거워하다고 고백한다. 그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는 즐거워할 뿐 아니라 묵상한다. 묵상하다의 ‘하가다’의 원의는 입술로 ‘중얼거리다’는 뜻이다. 율법을 읽는 것을 말하며, 반복하고 되네이는 것을 말한다. 누가 보지 않아도, 보고 있어도 그는 계속 율법을 뇌네인다. 왜냐하면 마음 깊이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즐거워한다는 말은 ‘반응하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기 위해서는 그가 무엇을 하는데 시간을 투자하고, 무엇을 사는데 돈을 사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데 시간을 투자하고 그곳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다. 그의 행복은 여호와의 율법을 중얼거리는 것이다.

 

주야는 문자적으로 밤과 낮을 말하지만 끊임없이 쉬지 않고 계속하여 묵상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너무나 즐겁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면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여 그것을 그만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악인들이 악을 따르고, 행하고, 타인을 조롱할 동안 의인은 율법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데 시간을 사용한다. 이것이 그의 본심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가. 우리는 어디에 시간을 보내며 무엇에 물질과 돈을 사용하는가. 핑계댈 필요 없다.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는 곳이 ‘나’다. 

 

3절 복있는 사람은 시냇가의 나무처럼

  •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절은 2절의 결론이다. 그는 시냇가의 심은 나무와 같다. ‘심은’의 원뜻은 옮겨 심져진 나무라는 뜻이다.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그 나무를 물가에 심은 것이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포도나무는 주인에 의해 포도원으로 옮겨 심겨진다. 울타리를 쳐서 보호해야 한다. 좋은 포도가 열리도록 가치 치기도하고, 북도 돋아주고, 거름도 준다. 해충도 쫓아내 준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는 기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늘을 보면 언제 비가 오나 걱정하지 않는다. 언제나 물이 곁에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양분과 물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강가에 뿌리 내린 성도들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세상이 아무리 기근이 와도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린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말씀이 곧 생명의 강이다. 요셉을 보라. 기근이 올 때 애굽에만 양식이 쌓여 있었다. 왜 일까?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대로 실천한 요셉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생명이고, 말씀이 행복이다.

 

그의 잎사귀는 마르지 않는다. 마음껏 펼쳐 나간다. 가나안에서 잎은 그늘을 제공한다. 쉼을 주고 행복을 준다. 그가 하는 일이 모두 형통한다. 물가의 나무는 걱정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다음 구절들을 통해 강은 말씀인 동시에 성령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령의 내주심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서 오는 갈증을 해소한다. 성령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샘물이다. 그 물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 나온다.

 

  •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요한계시록 7: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4절 악인은 겨와 같다.

  • 4절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 단호하게 선언한다. 3절에서 의인의 형통을 이야기한 다음 악인은 절대 의인들처럼 형통하지 않다고 강하게 선언한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지만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겨는 알곡이 없는 빈껍데기이다. 이곳에서 바람은 환란과 풍파이다. 어려움이 생길 때 악인은 날려 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마침내 드러날 것이다. 추수할 때 곡식을 바람에 날린다. 쭉정이는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지만 알곡은 바로 발아래로 떨어져 쌓인다. 종말에 일어날 심판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종말은 믿음으로 봐야 하며, 인내로 살아가야 한다.

 

나무와 벼는 대비된다. 나무는 변하지 않는 영원성과 든든함을 상징한다. 그에비해 쭉정이는 작은 바람과 환란, 요동, 고난에도 쉽께 날려가 버리는 허무한 것들이다. 악인들이 기대하는 변치 않은 영원한-든든한 것이지만 그들의 생각은 왜곡되고 타락하여 허무한 것들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하다 생각한다. 악인들은 결코 자신의 목적을 당성하지 못한다. 이 부분은 [성경의 상징 - 나무]를 살펴보기 바람

 

 

5절 악인들의 종말

  • 5절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5절부터는 결론이다. 먼저 악인의 결말을 보여준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이 불어 겨가 날아가듯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바람에 날려갈 것이다. 악인들은 가볍다. 가벼움은 물리적 가벼움이 아니라 영적 가벼움이다. 영적 가벼움은 가치 없음이며, 삶의 무의미다. 혼란의 폭풍이 불 때 말씀으로 채워진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은 어떤가? 무겁지 않고 가치 없고 무의미하다. 그들은 바람이 불 때 멀리 날려 간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져 나갈 것이다. '견디지 못한다'는 말에 좀 더 주목해 보면, 심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의 심판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에도 여호와하나님을 나의 반석, 요새, 피할 바위, 산성이라고 표현한 곳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심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진정으로 복된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삼은 자들이다.

 

구약에도 여호와하나님을 나의 반석, 요새, 피할 바위, 산성이라고 표현한 곳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심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진정으로 복된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삼은 자들이다.

 

  •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44:2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을 아브라함에게 친히 '나는 너의 방패'라고 소개하신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는 자들이 가장 복된 자들이다. 그 누구도 그들을 공격할 수 없다.

 

  • 창세기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의인들의 모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곳이며, 신약적으로 말하면 교회이다. 악인들은 하나님 밖에 거할 것이며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의 품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임에 참석할 것이다. 모임은 총회를 뜻하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6절 의인과 악인들의 종말

  • 6절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6절은 5절의 대한 결론이자 1편의 결론이다. 저자는 의인의 승리 또는 악인의 패망의 근거는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시제를 주의해 보자.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은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이기 때문이다. 포로적 상황에서 시편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유의하자. 길은 사람이 다는 길이 있는 것처럼 습관 방법, 생각 등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열왕기 기자는 여로보암의 길이 북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다고 선언한다. 여로보암의 길은 여호와께 제사해야 함에도 우상 특히 황금 송아지에게 제사하게 하고,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평민 중에서 뇌물을 바친 자에게 그 일을 맡겼다. 우상과 악으로 점철된 거짓된 삶의 방식이 바로 여로보암의 길이다.

 

  • 열왕기상 15:34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 열왕기상 16:26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반면 하나님을 기쁘게한 '다윗의 길'도 있다. 다윗이 생애 중에 잘못도하고 실수도 했지만 다윗의 최고우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그는 항상 모든 삶의 기준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길로 행한 이들에게 복을 주셨다.

 

  • 열왕기하 22: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 역대하 17:3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 역대하 34: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의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악인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이제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이제 시편의 문이 열렸다. 의인들은 흥황할 것이나 악인들은 멸명할 것이다. 누군가는 의인들의 길을 걸을 것이고, 누군가는 악인의 길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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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골라당 기원과 가르침

성경연구/성경강해|2023. 11. 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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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골라당 기원

  • 니골라당이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이었던 니골라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사람들의 무리를 일컫는 말이다.

 

니골라 일곱 집사 중의 한 명

 

처음 니골라가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6장으로 사도들이 말씀사역과 구제사역을 동시에 하면서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함으로 교회는 일곱 집사를 선출하게 됩니다. 이때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이 니골라입니다.

 

  • 사도행전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이후 니골라는 등장하지 않으면 오직 요한계시록에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2:6에 다른 한 번은 2:15입니다.

 

  • 요한계시록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 요한계시록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처음 니골라는 성령에 충만하고 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삐뚤어지고 자신이 탐욕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나타난 니골라당에 대해 알아 봅시다.

 

 

헬라 철학의 이분법적 사고

 

한 번은 '니골라 당의 행위'이고 다른 한 번은 '니골라 당의 교훈'입니다. 행위가 교훈(가르침)이 완전히 같지 않지만 여러모로 닮은 점이 이 있습니다.

 

먼저 니골라는 헬라철학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자로 육과 영을 이분법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초대교회 이단인 영지주의를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쉽게 말해 육신으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영혼이 깨끗하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기이한 주장입니다. 네오플라토니즘의 영향 아래 있던 헬라철학은 물질세계를 영 또는 정신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고린도 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헬라철학의 이분법적 사고를 예수님이 가르침에 적용한 것입니다.

  • 고전 6:9-1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돈을 받고 진리를 가르침

 

계 1:25은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으로 발람의 교훈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런데 발람의 교훈이 니골라 당의 교훈과 교차 사용되고 있습니다. 발람은 발락의 사주를 받아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못하게 막으심으로 축복만 하게 됩니다. 하지만 발락이 계속하여 돈을 주고 강청을 하자 우상숭배의 자리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초대해 간음하도록 가르칩니다. 즉 돈을 위해 그릇된 가르침을 베푸는 교활함을 발람의 교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니골라당도 발람처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며 탐을 내고 있습니다.

 

 

결론

이러한 상황들을 높고 본다면 니골라당은 헬라철학의 영항을 받아 이분법적 사고를 하며, 돈을 위하여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탐욕스러운 이단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닌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교활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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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성경연구/성경강해|2023. 11. 5.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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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1) 사랑, 2) 희락, 3) 화평, 4) 오래 참음, 5) 자비, 6) 양선, 7) 충성, 8) 온유 9) 절제 입니다. 성령이 아홉가지 열매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진 성도들을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는 열매를 말합니다.

 

 

1) 사랑(ἀγάπη love)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일반적인 사랑을 뜻하지만 신약의 저자들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만을 아가페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말하는 아가페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신 그 사랑과 그로부터 이어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은 무한한 하나님의 긍휼에 의존하며, 지혜와 능력을 포함합니다. 사랑은 용서를 뜻하지만 거룩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변화를 전제하며, 그 변화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무조건적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아니라 조건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용서는 종말의 심판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용서하지 않으며, 제한적입니다. 영원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열리는 사랑의 열매는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에 일어날 심판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삶과 생명이 무엇인지 바르게 설파하고,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일깨우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2) 희락(χαρά joy)

희락은 기쁨을 말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구원 받은 기쁨, 천국에서 누리를 기쁨을 이 땅에서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둔 세상 속에서도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세상이 절망스러워도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지하 감옥에서 찬양한 것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우울하고 슬픈 날에도 웃을 수 있습니다.

 

3) 화평(εἰρήνη peace)

화평은 신약에서 '은혜'와 함께 사용될 때가 대부분입니다. 화평은 사람과 사람간의 화평 이전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평이 먼저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화평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평을 전제하거나, 이후에 옵니다. 진정한 화평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가 화해하는 것입니다. 화해는 오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평의 상징입니다.

  •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4) 오래참음(patience/forbearance)

오래 참음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반드시 소망이 전제됩니다. 소망 없는 인내는 절망입니다. 왜 참아야 할까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참아야 하고 참을 수 있습니다.

  • 롬 5:4 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오래 참음은 환경에 대한 참음, 서로에 대한 참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음이 모두 포함됩니다. 환난 가운데 인내해야 하는 것은 환란 속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우리가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에게 오래 참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3: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운데 참아야 하고, 서로에게 참아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참아야 합니다.

 

5) 자비(kindness, 慈悲)

자비는 긍휼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긍휼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과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역지사지입니다. 주님도 친히 가장 큰 계명을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즉 이웃의 몸과 내 몸은 하나이어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자비는 상대방은 나로 대하는 것이죠. 그럼 친절하지 않을까요?

 

6) 양선(goodness, 良善)

선함은 친절한과 선한 마음을 아우르는 말이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뜻합니다. 아가소네스의 기본형 'ἀγαθός'는 하나님의 선함과 율법의 선함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은 곧 하나님의 완전성과 거룩성 등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신적 성품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양선은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뜻하며, 죄 많은 세상을 용서하시면서 동시에 거룩을 요구하시는 거룩한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착해야 합니다. 착함은 단순한 부드러움이나 순진함이 아닌 죄에 대한 진노와 더불어 연약한 인간의 욕망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긍휼이 내포됩니다. 자비와 긍휼, 하지만 거룩함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우러진 것이 양선입니다.

 

7) 충성(faithfulness, 忠誠)

 

충성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충성해야 하지만 복종이나 굴종이 아닌 자의적 충성이며, 진정한 충성입니다. 충성은 무지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에서 생겨납니다. 신뢰가 없는 충성은 무지하며 악합니다.

 

충성은 신실함을 뜻하며, 오랜 경험의 결과이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쌓아온 바른 행위와 신실한 이행 등을 알기 때문입니다.

 

8) 온유(gentleness, 溫柔)

 

온유는 부드러움을 뜻하며, 무례와 반대입니다. 무례는 상대방은 무시하는 것으로 악한 것입니다. 온유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할 때 밖으로 드러난 행위입니다. 온유의 근본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자녀입니다. 내 아들이라고, 나와 친하다고, 내가 돈이 많고 권력이 많다 하여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악한 것이며 마귀적인 생각이며 행동입니다.

 

9) 절제(self-control, 節制)

절제는 만족이며, 사랑입니다. 절제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지만 하지 않으며, 자기에게 부가 있으나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절제는 자기만족이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세워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의 자리를 벗어나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려 할 때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합니다. 타인의 것을 소유하려는 악한 마음을 갖지 않고 절제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람의 첫 거름입니다. 절제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며 힘을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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